본문 바로가기

인물노트

고은

http://m.navercast.naver.com/mobile_contents.nhn?rid=83&contents_id=8291




우리가 후회하고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오류를 범하면서 지혜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살아가면서 지혜가 하나씩 들러붙는 거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 조가비에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지혜는 후회에요.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후회와 잘못에서 나오는 성찰이지요.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쪽을 택하고 싶고, 어리석은 쪽이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라는 말 자체가 ‘너’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집에 가기 위해 타는 버스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태어나기 전 조상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우주 갈래에서 온 게 나입니다. 나는 많은 관계의 귀착점이자 무한한 관계가 전개되는 출발점이에요. 어디에 ‘나’만 뚝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우리 존재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에요. 이런 점에서 ‘관계’는 우리 삶의 총칭이에요.

죽음에서 시작한 1950년대의 허무주의와 1970년대 이후 거리에서 찾은 방향성, 이 두 가지를 아울러서 지금은 화엄이 나의 지향점이 되었어요.


 1950년대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당시 한국 사회의 핵심 정서는 실존주의였어요. 실존주의는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는 것이지요. 

이때의 존재는 철저한 단수입니다. 일례로 신문에 활자 하나가 거꾸로 잘못 찍혀 있을 때의 그 비복수성, 예외성을 실존이라고 부를 정도였죠. 전쟁의 폐허 속에 살아남은 젊은이들에게 단독자로서의 실존주의는 참으로 매혹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왔고, '나는 반드시 누구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는 연대의 시대로 건너갔지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고독한 단독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요. 1950년대로의 회귀인 것이지요. 혼자만의 골짜기에 갇혀서 사는 이들은 타인의 아픔을 보지 않아요. 가령 이라크는 고대 문명이 남아 있는 인류의 보고 아닙니까?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모든 꿈과 희망은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나는 학생들에게도 자주 "너는 앞으로 너 혼자 잘살지 말고 네가 밀치고 온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돼. 타자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절망을 딛지 않고서는 희망의 구체성이 없어요. 희망은 혼자 무지개처럼 떠 있는 게 아니고 절망을 토대로 생기는 거죠. 삶이 죽음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 이상, 꿈, 희망은 반대쪽의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통절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해요.

중동 지역에서 6만 년 전의 화석이 나온 적이 있어요. 조사를 해 보니 소년의 유골이었어요. 그런데 그 유골 이마 옆에 히아신스 꽃이 있는 거예요. 6만 년 전의 엄마는 지금의 엄마가 아니었지요. 거의 동물 비슷한 존재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식이 죽었을 때 그 옆에 히아신스 꽃 하나를 꺾어놓아두고는 슬퍼하면서 '지금보다 더 좋은 데로 가거라.' 염원했을 겁니다. 이것 자체가 시에요. 그 마음의 기껏 일부를 활자화한 것이 오늘의 시랍니다. 시는 인간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예요. 자기 안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