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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나이키/창업자/필 나이트/슈독/서평

 // 서평

 
책 초반부터 이 책을 읽을 때 가슴이 굉장히 두근거렸다. 
 
그리고 뭔가 내가 썼던 글을 읽고 있는 느낌도 굉장히 강하게 받았다. 필 나이트는 자신의 생각과 열정 열망을 나이키라는 것으로 실현하였다. 나 또한 반드시 이룰 것이다. earthy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 아이디어의 컨셉 차원이 아닌 역량의 차원에서) 비즈니스를 들고 나오고 그런 인재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청년들의 가슴에 마구 불을 지피는 그런 롤모델로 거듭날 것이다. 
 
끝까지 잘해서 진짜 증명하고 싶다. 조만간 하게 될거다. 모든 의미에서의 성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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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와 중에 느꼈던 잔상들을 넘버링해보면..
 
1.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걸 빨리 더 습관화시켜야겠다.
 
2. 그리스인 조르바 를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3. 승학이가 생각이 났다.
 
4. 책 한 글자 한 글자 속에 필 나이트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5. 세계 여행 꼭 해야지. 일들이 정리되고 나면 꼭! 
 
6. 버킷리스트를 계속 정해나가자.
 
7. 역시나 무대뽀 같은 허슬러 정신이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다. 
 
8. 아버지의 물질적 지원과 어머니의 정신적 지원이 정말 큰 한몫을 한 사례.
 
9. 필 나이트는 현장 방문을 통해 규모가 나오지 않는 비즈니스 오퍼레이션을 굉장히 잘하는 것 같다. 뭔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
 
10. 정확한 재무적 회계적 지식 위에서의 비즈니스 오퍼레이션.  +,-  
회계사로 일한 것이 아마. 

11. 대출도 햇구나.
 
12. 술을 엄청 많이 마셨네. 특히 와인
 
13. 필 나이트에게 엄청난 세일즈맨 파트너가 있었다. 존슨이라는... 
종윤이가 생각난다
 
14. 위기는 기회. 매출의 핵심 오니쓰카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나이키라는 브랜드가 탄생. 
 
15. 끝까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생각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것.. 답을 찾기 위한 집념.
 
16. 물리학적 사고로 문제에 대해 더욱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것.
 
17. 투철한 달리기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달리기 선수들에 대한 경의.
 
18. 멘토를 구하는 것. 멘토를 찾는 것. 
 
19. 비즈니스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나가야 되는 것. 
 
 // 기억할 만한 문구들
 
✔ 초심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숙련자의 마음에는 그 가능성이 아주 적다. -스즈키 순류
 
✔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하늘의 새들과 태양보다 더 일직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 싫든 좋든 인생은 일종의 게임이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 게임을 거부하는 사람은 방관자로 남을 뿐이다. 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내가 '미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런 미친 생각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어쩌면 이런 미친 생각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말이다.

 

✔ 24살 때 '미친 생각'을 했다. 그리고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 흔히 갖는 실존적 고뇌,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미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믿어진다고 믿었다. 미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 (책, 스포츠, 민주주의, 자유기업)은 미친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시작됐다.

 

✔ 1962년 그날 새벽에 나는 나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자.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거다.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는 멈추는 것을 생각하지도 말자. 그리고 그고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말자. 어떤 일이 닥치더라더 멈추지 말자."

 

✔ 나는 그 이후로도 그 보고서에 고나한 생각을 결코 중단해본 적이 없다. 스탠퍼드 시절에도 아침에 달리기를 할 때도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그때 그 순간에도 나는 일본에 있는 신발 회사를 찾아가서 나의 미친 생각을 전하는 순간만을 생각했다.

 

>> 나는 미국에 있는 스타트업을 찾아가서 혹은 만들어서 나의 미친 생각을 미국 대륙에 떠들어 대는 순간만을 생각한다.

 

✔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인류가 시도했던 위대한 탐험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의 존재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웅장한 사원, 교회, 신전, 가장 신성한 강과 산을 조사했다.

 

✔ 이번 여행과 '미친 생각'은 내가 아버지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 선종에서는 "현실은 비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모든 것이 현재다" 라고 말한다.

 

✔ 13세기 선종 승려, 도겐은 "자아를 연구하는 것은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 판매 전략은 간단했다. 그리고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나는 몇몇 스포츠용점에서 거절당하고는, 북서태평양 연안을 누비고 다니면서 육상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은 모조리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달리기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매일 밖에 나가 몇 마일씩 달리면,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파는 신발이 달리기에 더 없이 좋은 신발이라고 믿었다.

 

✔ 월급의 상당 부분을 신생 기업 블루 리본에 투자해 소중한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기업의 현금 잔액을 증가시켰다.

 

✔ 그러면서 자기자본 부족이 기업이 망하는 주요요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 바우어만 코치는 항상 가장 나은 방법으로 작은 성공을 이루어냈다.

 

✔ 사람들에게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줘라.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낸 결과로 당신을 놀라게 하라.

 

✔ 실패한다면 빨리하자는 마음속의 구호가 될 때까지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육상 선수들에게는 이처럼 멋진 성역, 단지 신발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이 신은 신발을 칭송하는 장소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에서 일을 끝내고 헤이즈와 술을 마시고, 주말에는 블루 리본과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매달 14시간씩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했다.

 

✔ 계약서와 5000켤레에 대한 주문서에 사인할 때,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보이려고 했다. 5000켤레를 주문하려면 2만 달러가 필요하지만 내 수중에는 그 돈이 없었다. 기타미는 동부 지역 사무소로 5000켤레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그 사무소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친구도 만나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사교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확실히 내 삶은 균형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훨씬 더 심한 불균형을 원했다. 내가 원한 것은 새로운 종류의 불균형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블루 리본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 내 삶이 온통 일뿐이고 휴식이 없을지라도, 나는 일이 휴식이 되기를 원했다.

 

✔ 조그만 신발 회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살아 숨 쉬는 새로운 생명체 같다고도 했다. 나는 이 생명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자라서 자기 힘으로 우뚝 서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 우델 부모님께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십니까?"라고 물어봤다. 우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일하는 회사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답했다.

 

✔ 보통 선수들은 자신감을 쌓는 데 대략 12년 정도 걸리지만, 이 젊은 친구는 그런 자신감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졌ㅅ브니다.

 

✔ 이처럼 드라마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매일 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 우리는 블루 리본과 수년 동안 함께 일해왔습니다. 우리는 블루 리본 사람들이 진실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허튼 소리를 하지만 블루 리본은 항상 정직합니다. 블루 리본이 이번 신제품 나이키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믿습니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개선하고, 고객들이 좀 더 행복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전달하고, 이 일을 열정을 가지고 효율적이고도 민첩하게 전개할 때 당신은 원대한 인간 드라마를 완성하게 된다. 이때 당신은 그냥 단순히 살아간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욱 알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사업이라면, 나를 사업가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아마도 이런 사업은 내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 본사 건물명은 나이키를 후원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조안 베노이트 새뮤얼슨, 켄 그리피, 미아 햄, 타이거 우즈, 댄 파우트, 제리 라이스, 스티브 프리폰테인. 이들 모두가 나이키의 정체성에 기여했다.

 

✔ 나는 <버킷리스트>의 대사를 계속 생각했다. "당신에게 영향을 받고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당신의 삶을 말해준다."

 

나이키와 함께했던 운동선수들과 나 사이는 항상 이럤다. 이심전심, 동지애, 연대의 감정이었다.

 

기업가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마디로 사기꾼이다. 기업가는 때로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포기해야 할 때를 알고,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할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포기는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업가는 결코 중단해서는 안된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 자신에게 믿음을 가져라. 이런 믿음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져라. 믿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 정의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 그 자체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정의된다.

 

✔ 창밖에 은은하게 빛나는 달을 흘끗 보았다. 옛날 선종 승려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바로 그 달이었다. 영원히 맑게 빛나는 달빛 속에서, 나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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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넥스트유니콘 독서모임 때 

 

슈독 내용 요약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위대한 육상 선수가 되길 바랐지만, 일류 선수의 등을 보며 달려야 했던 그저 그런 선수였다. 결국, 운동의 길을 포기하고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한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선수 시절 얻은 운동화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뿐이었다.

 

여느 20대처럼 자신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그는 1962년 배낭여행을 떠나며 자신에게 이런 다짐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자. 멈추지 않고 계속 가는 거다.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는 멈추는 것을 생각하지도 말자.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말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멈추지 말자.”

 

배낭여행 중에 무작정 일본 운동화 회사 오니쓰카(현재의 아식스)를 찾아가 있지도 않은 회사 이름을 말하며 미국 판매권을 달라고 설득한다. 마침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던 오니쓰카는 그에게 미국 서부 지역 독점판매권을 준다.

 

미국으로 돌아온 1963년 아버지의 집 지하실에서 블루 리본(나이키의 전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한다. 말이 사업이지 빌린 돈으로 수입한 신발 300켤레가 전부였다. 그가 수입한 운동화마저도 스포츠용품점에서 판매를 거절하자 직접 자신의 자동차에 신발을 싣고 육상대회를 찾아다니며 신발을 팔았다.

 

“이따위 신발을 팔라고 대학을 보낸 줄 아느냐”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다니던 회계사무소의 급여까지 사업에 투자하며 경영에 매달린다. 그러나 창업 후 6년 동안 자신의 기업에서 월급 한 푼 가져가지 못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

 

필 나이트는 불같은 성미만큼 운동화 개발에 열정을 가진 동업자 빌 바우어만, 운동화와 달리기의 숭배자 제프 존슨, 촉망받던 육상선수였으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보브 우델 등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신발에는 미친 괴짜들과 함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 내 가게’라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마침내 블루 리본은 아디다스와 퓨마가 주름잡고 있던 스포츠용품 업계에서 매년 매출을 두 배씩 확대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때도 나이트는 부족한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블루 리본에 적대적인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러 다니다 신경성 안면 장애를 겪는다.

 

1971년 자체 브랜드 나이키를 런칭한다. 나이키 런칭도 오니쓰카가 더 이상 신발을 공급하지 않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 이후 스포츠 스타를 활용한 공격적 마케팅, 와플형 밑창과 에어 쿠션 등의 제품 혁신으로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으며 업계의 1인자로 올라선다. 1976년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변경한다.

 

사업 첫해 매출액 8000달러에 불과했던 나이키는 현재 연매출 300억 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swoosh)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는 몇 안 되는 아이콘이 됐다.



1962년 : 미친 생각

 

18P

기업가 정신에 관한 강좌를 수강할 때였다. 나는 수업 과제로 신발 산업에 관한 보고서를 썼다. 보고서는 지극히 평범한 과제에서 지독한 집착 대상으로 변했다. 나는 육상 선수로서 러닝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경영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일본 카메라가 독일이 지배하던 시장을 뒤흔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나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러닝화가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23P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아버지가 내가 하는 말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벅, ‘미친 생각'이야. 모조리 헛소리야.” 하시면서 금방 반대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을 멈추자, 아버지는 안락의자를 앞으로 당기더니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못한 것을 항상 후회해왔다며, 이번 여행이 자식 교육의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좋아, 벅. 그렇게 해.”

 

34P

기장이 속사포 같은 일본어로 승객들에게 안내 방송을 쏟아냈다. 갑자기 땀이 나기 시작했다. 창밖의 비행기 날개에 새겨진 강렬한 이미지의 붉은 원을 바라보았다. 외할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 코레히도르 섬, 바탄 죽음의 행진, 난징 대학살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벤처 사업을 한답시고 일본에 가겠다고?

정말 ‘미친 생각’일까? 그게 아니라 그냥 미쳐버린 거 아닌가?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의사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늦었다. 비행기는 이미 활주로를 벗어났다. 

 

42P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나섰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엉뚱한 장소였다. 내가 간 곳은 오니쓰카 전시장이었다. 약속 장소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오니쓰카 공장이었는데 말이다. 급하게 택시를 잡고는 미친 듯이 달려갔지만 결국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네 명의 공장 간부진이 로비에서 나를 차분하게 맞이했다. 그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45P

헛기침을 하고는 발표를 시작했다. 갑자기 미야자키가 끼어들었다.

 

“당신은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십니까?” 

“아, 예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갑자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달려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마 그곳은 부모님이 계신 집일 것이다. 그 집은 지어진 지 수십 년이 됐는데, 집을 지은 사람은 부모님보다 돈이 훨씬 더 많았는지 그 집에는 ‘하인들의 숙소'가 따로 있었다. 바로 거기에 내 방이 있었다. 나는 방을 야구 카드, 레코드 앨범, 포스터, 책을 포함해 내가 신성하게 여기는 온갖 것들로 가득 채웠다. 한쪽 벽은 육상선수 시절에 영예의 표시로 받은 블루 리본으로 도배해버렸다. 나는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불쑥 대답했다. 

 

“블루 리본입니다. 저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블루 리본 스포츠를 대표합니다.”

 

46P

“미국 신발 시장은 거대합니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개척되지 않았습니다. 오니쓰카가 미국시장에 진출해 타이거를 미국 운동선수들이 주로 신는 아디다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을겁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던 내용을 그대로 설명했다. 몇 주에 걸쳐 조사한 제품과 판매량을 그대로 인용했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감동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중역진은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발표가 끝났는데도 분위기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침묵을 깨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들떠서 큰 소리로 말했지만, 나한테 하는 질문이 아니라 그들끼리 하는 대화였다. 그러고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꺼번에 나가버렸다.”

 

47P

당황스러운 몇 분이 지났을 때 그들이 스케치와 샘플 제품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라는 말로 입을 뗐다. (중략) 그리고 미국 신발 시장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어느 정도가 될지에 관해서도 물었다. 나는 앞으로 10억 달러 규모는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근거로 그런 숫자를 말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히면서 서로 쳐다보았다. 이제는 놀랍게도 그들이 나에게 제품을 팔려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블루 리본에서 타이거의 미국 시장 판매를 맡아주면 어떨까요?” 물론 나는 기쁘게 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1964년 : 자동차에서 신발을 팔다

 

66P

크리스마스가 지났을 무렵, 우편물을 찾아가라는 통지가 왔다. 1964년 첫 주, 차를 몰고 해변에 있는 창고로 갔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창고 직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내가 통지서를 건네자, 직원이 창고에 들어가서는 일본 글씨가 찍힌 대형 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전속력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가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신발 열두 켤레가 들어 있었다. 아이보리 화이트에 푸른 줄무늬가 새겨져 있는 운동화였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피렌체나 파리에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신발은 보지 못했다. 이 신발을 대리석 받침대에 올려놓거나 금테를 두른 유리 상자 속에 넣어두고 싶었다. 마치 작가가 새 수 첩을 다루거나 야구 선수가 새 배트 세트를 다루듯이 신발을 전등에다 비춰보기도 하고, 신성한 물건처럼 껴안아보기도 했다.

나는 두 켤레를 오리건대학교 시절 나의 육상 코치인 빌 바우어만 코치에게 보냈다.

 

74P

“자네가 보내준 일본 신발은 아주 좋아. 나도 자네 사업에 동참하고 싶네.”

나는 바우어만 코치를 한 참 쳐다봤다. 내 사업에 동참하고 싶다고?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는 단순히 자기 팀 선수들을 위해 타이거 운동화 몇 켤레를 주문하는 게 아니라, 내 동업자가 되기를 원했다. 신께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내 동업자가 되기를 요청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까? 나는 말을 더듬으며 “네,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75P

“어떤 파트너십을 생각하십니까?” (중략) 그는 생각에 잠기더니. “반반씩 하지.”라고 대답했다. 

“자네가 반을 투자해야 하네.”

“네, 알겠습니다.”

“1차로 1,000달러를 투자하지. 그러면 내가 500달러, 자네가 500달러를 내야하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종업원이 햄버거 두 개에 대한 계산서를 가져왔을 때도 우리는 반반씩 냈다.

 

79P

자쿠아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바우어만 코치에게 50대 50은 그다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것 같네. 그는 경영에 직접 뛰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리고 나중에 경영권을 놓고 자네와 사이가 틀어지기를 원하지도 않고. 51대 49가 어떤가? 그렇게 하면 자네가 경영권을 갖게 되지.” 

바우어만 코치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나는 “좋습니다. 그게…전부인가요?”라고 말했다. 

바우어만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건가?”라고 물었다. 나는 “네, 동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서류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눴다. 이로써 나는 전지전능한 바우어만 코치와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동업자 관계를 맺었다. 자쿠아 변호사 부인은 나에게 핫초코를 더 마실 것인지 물어봤다. 나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시멜로도 좀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79P

그날 늦게 오니쓰카에 내가 미국 서부에서 타이거 신발을 독점 판매 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리고 타이거 300켤레를 가능한 한 빨리 보내줄 것을 요쳥했다. 한 켤레에 3달러 33센트로 잡으로면, 300켤레는 대략 1000달러였다. 바우어만 코치가 투자했지만, 내 수중에 있는 자금을 합치더라도 1000달러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는 주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은 바라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신발 사업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신발이나 팔라고 나를 오리건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에 보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신발을 팔려고 돌아다니는 것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규정했다. 아버지는 “벅, 도대체 언제부터 이 따위 신발을 팔러 다니려는 생각을 했니?”라고 물어보셨다.

 

83P

어머니는 태연하게 지갑을 열더니 7달러를 꺼내며 “림버 업 한 켤레 살게."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도 아버지의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이다. 

아버지를 넌지시 비꼬려고 그러셨던 것일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육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사이즈 6짜리 일본제 운동화를 신고 난로 혹은 부엌 싱크대 앞에 서 계시던 모습, 저녁을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하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와 다투기 싫으셨는지 아버지는 내게 1000달러를 빌려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