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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노트

해체(주의)

공부를 하다가 해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고 물리학 단어 검색 이후에, 이렇게 단어 설명에 빠져든 것은 처음이다.


해체주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중심적이었던 것들을 전복하고 권위화된 것들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허위와 억압의 근원을 드러내고자 하는 해체주의는 20세기 철학의 가장 도전적이고 야심찬 기획으로 평가됨 직하다.

해체의 주요한 기획은 무수한 의미들을 생산해내는 ‘힘’을 붙잡으려는 데 있는 것이지, 기존의 의미를 전적으로 파괴하려는 데 있지 않다. 해체란 의미를 무너뜨리기보다는 ‘보충’하고 ‘대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해체는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해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서, 그 텍스트의 틈새에서 즐거운 유희를 벌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고정된 의미 체계를 역동적인 의미 체계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이 야심 찬 해체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주체에 의해 배제되었던 타자가 복위되고 주체와 타자는 ‘관계들의 조직망’으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소쉬르 언어 기호학을 사례로 들고와서 논의를 보강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기표와 기의 얘기를 꺼냈는데 뭔가 서양과 동양, 그리고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결국 해체주의라는 것이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극복하는 개념이라는 것, 거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서 개념의 생동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변화의 장으로 만들어놓고 객체를 고정시켜놓지 않는다.그렇게 때문에 틈새에 즐거운 유희가 벌어지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고, 여기서 언뜻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의 개념도 접목시킬 수 있을 것 같다.나만의 메타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고정된 의미 체계들을 부수고 역동적인 의미 체계로 전환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은 해체주의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설명들..

《그라마톨로지》의 서두에서 데리다는 소쉬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는 그의 탈구조주의적 기획은 보다 원대하다. 데리다는 우선 플라톤 이래 전개되어온 서구 철학의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한다. 이때 이성과 주체 중심적인 모든 태도들은 의문시된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모든 문화는 로고스(이법, 논리) 중심적으로 발전해왔는데, 그것은 문자언어보다는 음성언어에, 기표보다는 기의에 중심을 두고서 절대적 근원을 찾았기 때문에 오히려 본질적인 것과는 멀어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그는 기의의 초월적 현존(presence)을 믿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방법들을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보다 우위에 두었을 때부터 일어났는데, 그로 인해 음성언어/문자언어, 기의/기표, 선/악, 이성/감성, 주체/타자 등의 이항 대립이 생겨나고, 전자를 우위에 두는 로고스 중심주의가 후자의 요소들을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분법을 해체하고, 전자 못지않게 후자의 측면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논의들을 계발해낸다. 
그는 원문자(archi-ecriture)를 전제하여 음성언어가 문자언어의 파생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기의가 기표에 우선한다는 소쉬르의 견해를 넘어서 그 관계들이 역전될 수도 있다는 견해로 ‘기호들의 놀이’를 강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기의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기표가 될 수도 있는 순환적인 것이 된다. 즉 기의와 기표는 ‘관계의 조직망’에 놓여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거나 후자가 전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성언어라는 것도 원문자의 기표가 될 수 있고, 문자언어라는 것도 영상 언어의 기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렇게 해서 기의가 고정되지 못하면 어떤 확정된 ‘의미’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차이’만이 존재하게 된다. 차이의 ‘흔적(trace)’만이 텍스트에 남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차연(differance)의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텍스트의 기호들은 확정적으로 현존하는 의미를 지시하지 못하고, 거기에는 의미에 대한 효과만이 남게 된다. ‘차연’은 차이(differance)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로서 ‘차이’와 ‘지연’을 합한 개념이다. 데리다의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같은 음성언어일지라도 문자의 차이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르마콘(pharmakon)’은 ‘치료약’과 ‘독약’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쓰이고 ‘이멘(I’hymen)’은 ‘처녀막’과 ‘결혼(성교)’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쓰인다. 그렇다면 그 의미들은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 발화 자체만으로는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기표 사이에는 부재의 공간이 있어, 그 공간에서 차연의 힘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을 언뜻 볼 때 구조가 해체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 구조에서 힘을 발생시킨다. 즉 구조는 해체를 통해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시된 의미들은 절대적 현존에 이르지 못하고, ‘관계들의 조직망’ 속에서 지연되며, 또한 어떤 의미가 죽을 때만이 진정한 의미들이 생산되기도 한다. 차연의 끊임없는 유희는 의미가 흩뿌려진다는 뜻의 ‘산종(dissemination)’으로 나아가고, 그것은 의미의 영역을 무한히 확대시키게 된다.